성서 속의 밤 이야기

태초에 천지가 창조될 때 혼돈 가운데 빛이 생기고, 빛과 어둠은 서로 분리가 된다. 빛과 어둠은 각각 낮과 밤으로 불리고 천지창조의 첫날을 장식한다. 우리의 ‘하루’는 빛과 어둠, 즉 낮과 밤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비해 부족할 경우 온전한 하루는 존재할 수 없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있듯이 인간은 제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을 한다. 사물을 명확히 확인할 수 없는 밤은 인간에게 늘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밤은 네온사인과 전등 아래 그 모습이 벗겨져버렸고 이젠 더 이상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 아니다.

김진태 신부는 그의 저서 <성서와 함께하는 밤에 대한 묵상>(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0)에서 낮의 바쁜 일과에 묻혀 살아가는 것도 부족해, 밤까지 몰아내버린 우리 시대의 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천 년 전 성서 속의 밤은 어떠했을까. 이제 그를 따라 야곱과 베드로, 목자들과 동방박사들, 그리고 엠마오 제자들이 보낸 밤 속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보자.

야곱의 밤
창세기 25장부터 시작되는 야곱의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이다. 성서는 아버지 이사악이 야곱의 쌍둥이 형 에사오를, 어머니 리브가는 동생 야곱을 더 사랑했다고 전한다. 야곱은 꾀를 부려 형 에사오가 받을 장자권과 아버지의 축복까지 얻어냈고, 분노하는 형의 보복을 피해 가나안을 떠나 외삼촌 라반이 사는 하람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얻은 야곱은 놀라운 수완으로 재산을 늘리게 된다. 라반의 아들들은 이를 시기하였고, 결국 야곱은 외삼촌의 집을 도망치듯 떠나게 된다. 라반에게 쫓기던 야곱은 기지를 발휘하여 그와 화해하고 다시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고향에 있는 형 에사오를 만날 준비를 단단히 갖춘다.

이 상황에서 야곱과 하느님이 씨름을 하는 그 ‘밤’이 온다. 가족을 비롯해 자신에게 딸린 모든 것을 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야곱은, 그 밤이 다할 때까지 하느님과 씨름한다. 이 과정에서 야곱은 상처를 입고 다리를 저는 신세가 된다.

야곱의 싸움은 무언가를 쟁취하거나 승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밤의 어둠 한가운데서 하느님께 복을 비는 인간의 기도 였다. 복을 주지 않으면 놓아드릴 수 없다고 떼를 쓰는 야곱. 그것은 자기 자신과 치르는 싸움이기도 하였다.

바로 이 밤에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된다. 그 밤은 야곱의 존재를 바꾼 밤이었다. 그리고 환도뼈를 얻어맞은 야곱, 곧 이스라엘은 그후 절뚝거리며 살아가는데, 이는 야곱의 존재가 변화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시켜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목자들의 밤
예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을 때, 부모 외에 처음으로 그분의 탄생을 기뻐하며 경축한 이들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다. 이들이 “밤을 새워가며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고 성서는 전한다. 목자들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노동, 뜬눈으로 지새는 밤의 수고로움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그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에게 밤은 천사의 음성을 들려주는 시간이다. 밤은 천사의 힘이 작용하기에 적당한 시간이며, 표징은 마치 밤에만 빛나는 별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목자들처럼 자기 일에 충실하면서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순박한 마음을 가질 때에만 천사가 가르쳐주는 표징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낮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지식을 전해주지만, 밤은 표징만을 가르쳐준다. 낮은 우리에게 보이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만, 밤은 순수와 성실로써 인내심을 가지고 표징을 해석하라고 초대한다.

동방박사들의 밤
예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을 때, 박사들은 동방에서부터 별의 인도로 그분께 경배를 드리러 베들레헴에 왔다. 그들은 밤이 어두울수록 인생의 어둠에 좌절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사하는 이들이었다.
동방박사들은 인생의 어둠을 보상할 만한 어떠한 유혹의 속삭임(이데올로기)이나 그럴듯한 약속의 말을 모두 거부한 이들이다. 그들은 기꺼이 인내와 희망으로 마음을 채운 채 어둠 속에 앉아 별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첫 마음이던 순수함과 우직함을 잃는다면, 그 순간 모든 것으로부터 방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동방에서부터 계속 별을 따라오던 동방박사들은 어느 순간 별을 잃게 된다. 이때 그들은 성서의 말씀을 탐구함으로써, 다시말해 말씀의 의미와 깊이를 공부함으로써 별을 다시 찾게 된다. 예수께서는 별의 형상을 통해 우리를 당신께 인도하려 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이 건네시고 보여주시는 상징을 볼 줄 알아야 하고, 그 상징을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해석한 내용에 따라 삶의 발걸음을 뗄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지식에 덮여 별을 잃고 헤매는 어둠 속에서도 신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담을 줄 모르는 막연한 신학 지식은 배제되어야 한다. 현세적 권력과 맞붙어 권력에 이용당하는 섣부른 신학 지식은, 헤로데가 죄없는 어린아이들과 사람들을 살해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과 같이 그렇게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지리적 원근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그분은 상징을 통해 우리를 당신께로 가까이 인도하시고 있다.

베드로의 밤
베드로의 밤은 온통 인생살이의 허덕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하다. 최후의 만찬 그 마지막 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이라는 단어까지 쓰신다. 바로 이처럼 ‘대책 없는’ 인간인 우리가 믿음을 잃지 않기를 빌어주시는 예수님의 기도가 그 절실함을 더해간다. 때로는 사탄의 작용이라고 생각될 만큼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기도 한다. 속으로는 선하게 살아야겠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거듭 악하게 처신하곤 한다. 그래도 믿음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예수님의 기도로 ‘다시’ 선하신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다.

베드로와 함께한 최후의 만찬날 밤은 예수님이 교회의 탄생을 준비시키신 밤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네가 나에게 다시 돌아오거든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달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교회의 첫 수장(首長)인 베드로와 나누시는 저 밤의 대화를 통해 어떻게 교회가 바로 서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수난 전날 밤. 가장 괴로운 고통의 밤. 그러나 그 밤은 동시에 예수님에게는 기도하시는 밤이었고, 인간에게는 자만하던 믿음의 허위성이 드러나는 밤이었다.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가도 좋고 죽어도 좋습니다”하는 인간의 고백이 얼마나 엄청난 거짓이었는가. 인간은 자신의 신앙의 견고함을 자랑하고 내세울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와 다른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

인간만이 기도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수난 전날의 저 밤에 인간은 오히려 자만에 차 여전히 거짓된 고백을 자신 있게 해대고 있었다. 반면, 바로 그 순간에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고 계셨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시는 예수님. 게다가 저 밤에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 인간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고 계셨다. 제발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달라고 간청하시는 하느님. 그 밤은 이러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건이 일어난 밤이었다.

베드로가 경험한 밤의 체험은 예수님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더 이상 자기 잇속을 차리는 사람의 말투가 아니다. 인간 상식에 기대어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의 말투가 아니다. 이러한 태도는 준비된 밤을 겪은 베드로였기에 가능했다. 예수께서 준비시키는 밤은 인간에게 두려운 하느님, 인간적 경험과 상식을 무한히 초월하는 분을 체험하게 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인간의 겸손한 자기 고백을 터전으로 삼는다.

엠마오 제자들의 밤
눈에 직접 보이는 세계가 닫히면, 생각지 못한 다른 감각이 우리 안에 열린다. 눈뜨면 보이지 않던 것이 눈을 감으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은 기도하는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익혀지는 것이다.
성체 앞에 합장한 손에는 감겨진 눈이 가장 잘 어울린다. 아무것도 보지 못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아무것도 들을 수 없을 때 비로소 들리는 것이 있다. 무덤에 묻혀 영영 죽으신 줄로 알았던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던 날 밤에 부활하셨다는 우리의 믿음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이루어진 그 밤 시간을 새롭게 보게 해준다.